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다를랑 (문단 편집) == 북아프리카에서의 행적 == 1942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로 그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건너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연합군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침공 작전인 [[횃불 작전]]이 발동됐고, 다를랑 제독은 우연찮게 현지 최고 선임자로써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그를 비롯한 프랑스군 [[장병]]들은 [[캐터펄트 작전|2년 전 영국 해군이 자신들에게 했던 행위]]를 잊지 않고 있었기에 상륙하러 오는 미군과 영국군에 저항했다. 다음 날,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해 온 연합군에게 다를랑 제독은 포로가 되었다. 비록 미약하다 할지라도 프랑스군의 저항은 연합군에게 있어 그닥 좋을 것이 없었고, 다를랑 제독은 연합군이 자신을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해 현지의 통수권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프랑스군에게 저항을 멈추도록 해줄 것을 제안했다. 연합군이 이 거래를 수락함으로써 11월 10일 프랑스군의 저항이 멈췄으며, 4일 뒤 연합군은 약속대로 다를랑 제독에게 고등 판무관 자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비시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히틀러가 비시 프랑스를 향해 군대를 파견, 주둔시키고 사실상 직접 통치를 하기 위해 [[안톤 작전]]과 그 전신인 [[아틸라 작전]]을 개시하는 사태를 야기했다. 그 일환으로 독일군은 프랑스 함대를 접수하기 위하여 프랑스 남부의 군항 도시인 [[툴롱]]을 향해 진격했는데(라일라 작전),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툴롱의 프랑스 해군은 이들이 자신의 함정들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대부분 자침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를랑 제독은 처칠에게 '''"[[윈스턴 처칠|각하]], 이제 (2년전에 했던)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라는 전보를 보내 일침을 날렸다.~~ 뒤끝 돋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